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카메라 앞에서 벌거벗다” 전시를 통해 나체의 변증법을 밝히다.

브라사이(Brassaï), "누드", 1931-34,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The Estate of Brassai)

“카메라 앞에서 벌거벗다” "Naked Before the Camera"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갤러리 852
1000 Fifth Avenue (at 82nd Street), New York
2012년 9월 9일까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작은 하워드 길맨 갤러리(Howard Gillman Galleries)는 입구에 “벌거벗은(Naked)”라는 단어가 적힌 광대 불빛과 함께 치장된 차양이 아니었다면 지나치기 쉬웠을 것이다. 이 전광판 사인은 남성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현란한 티엔에이 엔터테인먼트의 소프트 코어(덜 자극적인) 포르노그라피를 암시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신망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인 이곳에서 제시하는 유머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호화로운 천막은 마치 이 전시를 낮게 평가하는 것과 같다. 19세기 중반에서 2009년도 대의 시대를 아우르는 90개 가까운 사진전인 “카메라 앞에서 벌거벗다”는 자극적이기 보다는 사색적이다. 전시에 포함된 작품들은 에드워드 무이브릿지(Edward Muybridge)의 사람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유사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험한 사진에서부터 한나 윌케(Hannah Wilke)의 초상화 작품, 초기 민족지(誌)적인 사진, 인류학적인 목적을 위해 찍힌 게이 바디빌더 포르노 사진 등이다. 이러한 옷을 걸치지 않은 남녀 사진 작품들은 에로티시즘과 승화 사이, 몸의 외적 쾌락과 평범한 성적 흥분상태를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시키려는 열망 사이와 같은 미술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좀 더 예술적인 용어인 “나체(Nude)” 대신 “벌거벗은(Naked)”이란 단어를 택한 전시 제목의 의미론적인 결정은 매우 흥미롭다. 영국의 보수파 미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1951년 “누드: 이상적 형태에 대한 연구(The Nude: A Study in Ideal Form.)”라는 논물을 발표하며, “naked”와 에 대하여 인문주의적인 변증법에 대하여 요약했다. (그는 이후 비비씨 텔레비전의 “문명(Civilisation)”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사회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naked”는 옷을 거리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이 단어는 이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어색함 또는 쑥스러움을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nude”라는 단어는 균형 잡히고 풍부하고 자신감 넘치는 몸 (재 형성된 몸)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비평가인 존 버거(John Berger)는 그의 책 “보는 방법 (Ways of Seeing)”에서 위와 같은 케네스의 접근 방법을 완전히 뒤엎었다. 그의 이론에 따른 누드란 승화되거나 품격화된 몸이 아닌 남성의 시각에 맞추어 상품화된 여자의 몸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누드(나체)는 벌거벗은 몸을 하나의 물체로 보는 것과 같다.”

“카메라 앞에서 벌거벗다”의 전시를 삽화가 포함된 케네스와 존 사이의 논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시된 작품들 속에서 이상화와 리얼리즘의 사이, 그리고 승화와 섹스, 누드, 벌거벗은 상태 사이의 긴장감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승화”를 시키기 힘든 미디엄이라고 생각해보자. 빅토리안 픽토리얼리스트(영상 중심 주의자)인 오스카 귀스타브 르란더(Oscar Gustave Rejlander)작가는 19세기 회화 작품 속의 과장된 화려함을 그의 연출된 우화적인 사진에 담아냈지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육체는 감출 수 없다. 대부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1850년대 많은 누드 사진들은 해부학 연구, 순수 예술, 성애물 사이의 애매한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진 작가 줄리엔 블라 드 빌레베뉴베(Julien Vallou de Villeneuve)의 1853년 작품 “기대고 있는 여성 누드(Reclining Female Nude)”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앵무새와 여자” 작품의 모델로 쓰였다. 오토만위에 기대고 있는 이 모델은 몸의 곡선을 보이는 오달리스크의 우아한 포즈를 연상시킨다. 오리엔탈리스트적으로 꾸며낸 이 사진은 자극적인 엑소시즘을 연상시키고, 몸의 표현과 연극용 소품으로 이러한 상황을 연출했다. 마찬가지로, 1850년에 익명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앉아있는 여성 누드(Seated Female Nude)”의 다게레오타입(은판 사진) 속 여성은 관객으로부터 얼굴을 3/4정도 틀어 등을 보이고 있다. “화장실 속 여인(lady at her toilette)”의 여자는 마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고전주의작 “발팽송의 목욕녀(Valpinçon Bather)”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진상의 이 포즈는 어색할 뿐이다. 

토머스 에이킨스의 1883년도 해변가에서 나체로 찍은 토마스 자신과 한 학생의 초상화 작품 (몇백개의 비슷한 이미지 중 하나)는 순수 그리스도의 동성애를 나타낸다. 그들의 앙증맞은 엉덩이와 마른 다리와 함께 그들은 남성의 육체적 완벽성에 대하여 폴리클리탄 명상이다. 동시에 그들은 틀림없는 진짜이고 에로틱하다. 에이킨스는 그의 친구 월트 휘트먼과 함께 최초-히피 나체주의에 대하여 책을 냈는데, 이 안에 쓰인 태연함과 중립의 표면 아래 끓고 있는 욕구에 대하여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초기 누드 사진들은 회화 작품들에 대항하여 사진 미디엄에 대해 정의 내리고자 하는 초기 단계의 어색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들이다. 이 누드 사진에서 나타내고자 한 고전주의는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은 프랑스 비평가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한때 말한 사진의 “이미 본” 일시성에 대해 말한 것과 관련 지을 수 있다. 이 사진에서 발견된 이와 같은 실패 속에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사진은 고전주의적인 면에서 “nude”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naked” 상태에서 끝나고만 것이다. 무명 작가 프랑크-프랑수아-제네스 샤바사그네스(Franck-François-Genès Chauvassaignes)의 1856년 작품은 주목할 만한 예외 작품인데, 이 것은 아카데미 예술의 겉치레를 모두 포기하고 사진을 찍었다. 수척한 모델은 공허한 눈으로 힘없이 지저분한 스튜디오에 기대 앉아있다. 그녀의 매부리코, 야윈 몸, 말같고 남자처럼 생긴 생김새는 툴루즈-로트레크와 초기 피카소 작품의 매춘부를 예시한다.

이렇게 승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은 결코 19세기 사진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더니즘 안에서도 이어져왔다. 이는 여성의 특정한 몸의 부위를 택하거나 길이를 줄여 하나의 추상화된 조각품으로 표현하는 브라사이(Brassai), 맨 레이(Man Ray), 웨스톤(Weston) 작가들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하이 모더니스트적인 인체의 뒤틀린 상(像)을 표현한 사진들은 아마 이 전시에서 인체를 제일 물건 취급하여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얼빙 팬(Irving Penn)의 윌렌독피안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ian) 누드 사진에서는 고전주의 조각상을,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사진 속 중성미를 지닌 패티 스미스(Patti Smith)를, 한때 충격적을 안겨주었던 다이안 아버스의 “여성이 되어가는 나체남(A Naked Man Being Woman)” 사진이 있다.

이 전시에서 “벌거벗은 상태(Naked)”라는 단어의 의미는 누드 사진이 제시하는 놀라운 다면성을 보여준다. 의 놀라운 다원자가(多原子價)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해방시키기도 하고 물화(物化)시키기도 하고, 자극을 주거나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을 벗어나거나 고질적인 권력 구조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사진의 대부분이 남성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여성의 나체를 담아냄으로써, 시선 정치에 대한 언급의 필요성은 불가피하다.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인형(Doll)” 사진(전시에서 실제 사람을 묘사하고 있지 않는 단 하나의 작품)이 전시에 포함 된 사실은 상징적이면서도 특이하다. 벨머의 훼손되어 다시 만들어진 마네킹은 살아 있지 않는, 선호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남성의 욕구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한나 윌케 작가는 이것을 그녀의 누드 초상화에서 다루었다. 한나 작가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필름 스틸(Film Stills)”에서 표현된 페미니스트 논제를 예상한다. 이 논문은 한 사람의 정체성은 코드화된 포즈, 의상, 몸짓들로 이루어져 과도하게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나 작가는 이에 한 단계 더 나아가 미술사가 린다 네드(Lynda Nead)가 말했던 “기호학적 몸의 순수성과 도구로서의 기능을 따르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벌거벗음 조차도 하나의 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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